열린마당

[주부살롱] 우리는 이렇게 살아간다/정감녀

정감녀ㆍ춘천 소양로본당
입력일 2011-05-03 수정일 2011-05-03 발행일 1981-08-30 제 1269호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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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오후 네시쯤 되면 도어폰의 벨소리가 요란히 울린다. 막내 바오로가 재빨리 버턴을 누르고 현관으로 뛰어 나간다. 「바오로, 공부 잘했어?」하시는 굵직한 아빠의 음성이 돌려온다. 그때야 이방 저방에서 5남매나 되는 아이들이 우루루 달려 나온다. 우리는 재빨리 저녘식사를 준비하고 함께 오손도손 식탁에 둘러 앉는다. 식사가 끝나면 저녘기도를 아이들과 함께 고상앞에서 바친다. 그 다음 일요일에는 식전부터 바쁘다. 아이들을 성담에 보내야하고 열한시 미사에 아빠와 내가 가야하기 때문에 하루쫑일 바쁘다. 우리 온가족이 성당에 나가게 된 것은 오직 주님의 이끄심이라고 생각하면서 오로지 우리 가정의 성화와 나아가서는 이웃 안에서 좀더 나은 삶,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항상 주님께 구원을 청한다.

어느때 우리 아이들 형제가 다투었을때다. 아빠는 조용히 그애들을 불러서 고상앞에 끓어앉히고 자기가 주님께 잘못을 비는 것이었다.

「주님, 제가 자녀교육을 잘못 시켰으니 용서해 주십시요」이것을 본 아이들은 울음을 터뜨리면서 「아버지, 용서해 주세요」라고 했으나 아빠는 「너희들을 내가 용서하기전에 먼저 주님께 용서를 청하고 사과를 드려라」하셧다. 그후에 아이들은 다시는 싸우는 일이 없었다. 이렇게 주님안에서 생활하고 주님안에서 잠드시는 아빠를 볼때에 나는 무한히 기쁘고 주님께 감사하며 가정성화에 더욱 노력한다.

그럼 지금부터 30여년전으로 돌아가서 내가 영세를 하고 그후에 악몽의 구렁텅이에서 주님을 망각하고 깨어나지 못했던 시절의 이야기로 돌아가야겠다.

그 꽃다운 시절 십칠팔세 때에 나는 인생의 허무함을 느끼게됐다. 인생은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걸까…수없이 죽어가는 인생의 방향을 도저히 알길이 없었다. 그렇게 살다가 왜 그렇게 죽음이라는 것이 우리를 덮치는지 그 까닭을 알고 싶었지만 피곤해지는 내머리만 쇠약해갔다. 이때에 이웃에 성당에 다니는 아주머니의 권유로 첫발을 디디게 됐다.

이곳에서 인생, 죽음과 삶 허무와 미래가뜻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됐다.

우리 인간은 분명히 죽음이 있은 후에 영원한 삶이 있다는 것을 절실히 배우고 느꼈다.

드디어 영세를 하고 견진을 하게됐다. 독실한 불교를 믿는 집안에서 유달리 나혼자 만이 성당에 나갔던 것이었다.

그후 지금의 아빠와 결혼을 했으나 시댁 또한 외인이었다. 우리는 겨우 관면 혼배를 받고 결혼이라는 첫발을 내디뎠다.

십이년이라는 길고도 짧은 세월에 주님을 망각하고 시집살이라는 굴레에 얽매였으나 그래도 일년에 두번 판공성사때는 휴가를 얻어 꼬박 성당에 나갔다.

이렇게 지내는 동안에도 슬프고 괴로운일이 있을때면 항상 영세를 주시던 신부님을 기억하고 나태해 지려는 마음을 채찎질했다.

어느덧 세월은 수년이 흘러가고 아빠는 어느 학교에 첫발령을 받으셧다.

이때부터 우리의 신앙생활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성당밑에 초가삼간을사고우리는 삶의 보금자리를 꾸몄던 것이다. 우리는 열심히 살았다. 비교적 성실하게 살았다.

그러는 동안에 주님의 은총으로 아빠도 영세ㆍ견진을 다하시고 아빠는 1차, 나는 3차 꾸르실료를 받았고 신앙심은 더욱 불타기 시작했다.

그래서 우리를 보고 부부스타라고들 하지만 아직 그런 말을 듣기에는 좀 이른것 같다. 우리 부부는 본당 각단체에 가입해서 나름대로 하느라고 노력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부터 25년전에 관면흔배를 했지만 금년 5월 24일 에는 본당에서 혼인갱신식을 가졌다.

우리 부부에게는 더 없는 기쁨이었다. 우리는 주님앞에서 앞으로 얼마 남지않은 여생을 다시금 맹세하며 주님을 위해 살것을 다짐했다.

결혼식을 앞둔 처녀같이 마음이 설레었다. 아빠는 「우리값싼 반지라도 주고 받으며 전에 못다한 한을풀자」고 하셨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이웃과 함께 영원히 영원히 사랑을 나누며 주님의 품에 안길 날을 간절히 기도하면서 살아가련다.

정감녀ㆍ춘천 소양로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