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신달자의 주일 오후] 우리는 무엇을 미루고 사는가?

입력일 2009-12-16 수정일 2009-12-16 발행일 2009-12-20 제 2677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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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인생을 위해 우리의 삶 돌아보며 자서전을 써보자”
서울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5층 찻집에는 늘 할머니 다섯 분이 앉아있다. 할머니들은 출근하듯 오전 11시면 나와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고, 12시가 되면 점심을 같이 먹고 다시 차를 마시며, 오후 4시쯤 되면 다 같이 퇴근을 한다. 물론 나는 직접 뵙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이야기다. 중요한 것은 할머니들이 모두 단아하게 외출 예복을 잘 차려입고 다닌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일곱 분쯤 됐는데 어느새 그 숫자가 조금 줄었단다. 할머니들은 만나면 딸 사위 며느리가 어떻다는 등 제법 이야기가 많았는데, 언제부터인가 아무 말도 없이 하루 종일 앉아만 있다 간다는 것이다. 모두들 잘 사는 집의 할머니들이었는데, 서로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웃거나 화내지도 않고 앉아있는 모습이 조용한 그림 같았단다.

서로 할 말이 없으면 더 이상 만나지 않을 것 같은데, 이 분들은 그렇게 얼굴만 바라보다 간다는 것이다. 사실 사람구경을 하자면 그곳보다 편히 할 수 있는 곳이 또 있겠는가. 할머니들은 차츰 하나 둘씩 나오지 않더니 지금은 두 명만 가끔 얼굴 비치는 정도가 됐다.

나는 이 이야기가 슬프고도 아름답다고 느껴진다. 정장을 하고 외출하는 것은 나이 들수록 어려운 일이다. 할머니들도 대개 팔순이 넘은 분들이다. 친구들과 만나는 사이에 할머니들은 육체의 통증을 잊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살다보면 그렇다. 오늘 바쁘다는 이유로 내일로 미루는 것이 많다. 그러다가 그 내일이 한 달, 일 년, 오 년으로 미뤄지게 된다. 결국 기억에서 잊혀진다. 내가 그렇게 아쉬워하며 언젠가 반드시 해야 한다고, 마음의 보따리에 꼭꼭 묻고 언젠가는 그 보따리를 풀어 마음 놓고 해보겠다던 바로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나이가 들어 조금 한가해져 시간적 여유가 생기면, 반드시 해야겠다고 미뤄둔 것이 사실 생각보도 많았음을 깨닫게 된다.

책 읽는 것도 그 중 하나다. 좋은 책들을 서재에 쟁여 놓고, 먼지가 앉고 바람이 먼지를 쓸어 가고 다시 먼지가 앉고, 그래도 ‘두고 봐라. 언젠가 나는 널 읽을 것이다’ 하며 미룬 책들도 그 중 하나다.

젊었을 때는 나이 들어 하고 싶은 일이 많다. 그러나 막상 나이가 들어도 그것은 용이하지 않다. 저렴한 돈을 들여 기차를 타고 여행을 해 보고, 꼭 한번 가보고 싶었던 바다나 산이나 사찰도 가보고, 어느 마을에 예쁜 성당이 있다는데 거기도 가보고, 저녁나절 노을을 보며 동네 주변을 걸어도 보고…. 그렇다. 둘이도 셋도 좋지만 나이가 들면 혼자 노는 법을 익혀야 건강할 수 있다. 집에서 혼자 맛있게 수제비를 끓이고 전을 부쳐 동네 사람들과 나누는 것도 좋다. 물론 이런 일도 나이 들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정말 우리가 미뤘던 것 중에 ‘자서전’을 써 보면 어떨까. 문장이 나쁘면 어떤가. 어디서 태어나서 어떻게 살아왔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독보적인 것이다. 남과 다른 삶의 이야기는 좋은 소설이요, 읽을거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언젠가 노인이 된 여성 두 분이 나를 찾아와 자서전 쓰는 공부를 하고 싶다 했었다. 늙고 보니 인생이 허무하고 별로 할일도 없는데, 살아 온 이야기를 쓰면 자식들에게도 본보기가 되고 지금부터 인생을 더 소중하게 살 수 있을 것 같다 했다.

물론 나는 그들의 부탁을 들어 주지 못했다. 그들에게서 진지한 삶의 태도를 엿볼 수 있었다. 하루에 두어 시간만 내서 살아 온 삶을 되새기고 글로 써 보자. 처음에는 어색하고 말문이 트이지 않겠지만, 스스로 감동하다 보면 애착이 갈 것이다. 자서전이야말로 우리가 미뤄온 우리 생애의 숙제가 아니겠는가. 그 자서전은 한 가정의 소중한 보물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