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신달자의 주일 오후] 남미의 한인성당을 가다

입력일 2009-11-18 수정일 2009-11-18 발행일 2009-11-22 제 2673호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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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거리였다. 문학행사를 갖기 위해 남미의 브라질까지 25시간의 비행기를 타고 갔다. 그리고 다시 세 시간을 더 타고 나서야 목적지인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했다. 집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져 그곳에서의 열흘은 마치 열 달과도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여행 중 시계를 고칠 필요가 없었다. 한국이 새벽 두 시면, 그곳은 낮 두시다. 지구의 정 반대편에서 나는 늘 떠나고 싶어 했던 한국을 다시 그리워했다.

그곳에는 ‘백구촌’이란 한인들의 마을이 있다. 궁핍했던 초기 이민자들이 생존을 위해 모여들었던 곳이다. 이제는 안정을 찾은 한인들이 떠나고 남은 자들과 더 가난한 이들이 모여 살고 있다. 그곳에 한인성당이 있다.

백구촌에 들어서면 아직 덜 익은 듯한 동네의 어설픔이 느껴진다. 그러나 오갈 곳 없던 한국인들이 둥지를 틀었던 당시의 긍지와 의지가 느껴지는 곳이며, 옛날 고향의 나지막한 골목길도 떠올리게 된다. 설핏 슬픔이 밀려오기도 하는 그런 곳이다.

한인들은 제각각 사는 곳이 달라도 늘 백구촌으로 찾아온다. 그리움이 있고, 또 성당이 있기 때문이다. 브라질이 상업적인 도시에 가깝다면 아르헨티나는 정서적인 도시다. 그래서 그런지 아르헨티나의 한인들은 특히 정이 많고 순하며 아름다워 보인다. 어려운 삶의 터전을 일구며 먼 이국땅에서 살아왔지만 꿋꿋하게 한국인의 정신을 잃지 않고 산다.

그곳의 10월에는 ‘어머니날’이 있다. 어머니날에는 선물로 옷을 드리는 것이 상례다. 그 옷은 대부분 한국 사람들이 만들어 판다. 그래서 이곳의 한인들은 어머니날이 오기 두어 달 전에는 야간작업까지 할 정도로 바쁘게 보낸다. 그곳 사람들은 어머니에 대한 특별한 정이 많다. 그래서 어머니날은 어느 축제일보다 크다. 어떤 형태로든 이날 선물을 받지 못하는 어머니는 없다.

내가 한인성당을 찾은 날은 어머니날 전 날이었다. 모두들 바빴지만 사람들은 잠시라도 짬을 내 성당으로 모여들었다. 성당이 지어지고 처음으로 사람들로 가득 찼다는 말에 나는 잠시 목이 메었다.

나는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로 강연을 시작했다. ‘우리의 어머니, 성모님이 여기에 계신다’로 시작한 어머니 이야기는 내가 하느님을 만난 이야기와 내 삶에 영향을 끼치신 하느님 이야기로 이어졌다. 가능한 소박하고 진솔하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날 백구촌의 한인성당은 진정으로 성모님과 주님을 따르며 더 낮은 자세로 그분을 닮아 신앙생활을 하겠다는 다짐들로 뜨거웠다. 그들은 고통과 싸우면서도 결코 주님을 가슴에서 내려놓지 않은 한 시인의 삶을 박수로 격려했다.

나는 어둠속 빛에 대한 체험을 이야기하며 그들과 한 형제자매로서의 사랑을 나눴다. 반응은 뜨거웠고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서로의 손을 맞잡은 동질감에서 하느님의 축복을 느꼈다. 우리들의 가슴은 그 어느 때 보다도 달아올랐다. 나 또한 한국에서의 강연과는 여러모로 달랐다. 그들의 눈에서 아픔을 이겨내며 하느님을 멀리하지 않고 살아 온 지난날의 삶이 보였기 때문이다.

미사가 끝나고 강연도 끝났지만 그들은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우리는 함께 모여 고국을 이야기하고 고향을 이야기했다. 학교 동창이었던 친구 한 명은 남편을 잃고 병이 깊어 있었다. 나는 말없이 그이의 등을 두드렸다. ‘그래, 다 안다….’ 그 말이 입에서 나오는 것을 꿀꺽 참았다.

그곳엔 또 하나의 대한민국이 있었다. 그들과의 나눔 안에서 나는 자연스럽게 먼 이국땅이 아닌 한국 동네의 어느 성당에 와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왜 하느님 안에서는 모두 하나 됨을 이룰 수 있는 것일까. 그 또한 눈물겨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