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정영식 신부의 영성적 삶으로의 초대] (79) 글을 마치며

정영식 신부·수원교구 영통성령본당 주임
입력일 2009-09-23 수정일 2009-09-23 발행일 2009-09-27 제 2666호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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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마련한 나의 자리로 돌아가자
오만함 벗고 형성에로의 초대에 응해야 할 때
먼 길을 걸어왔다. 그동안 먹을 것 별로 없는 초라한 잔치로의 초대에 응해주신 많은 독자 분들께 감사드린다. 마무리 글은 신앙생활의 기쁨에 관한 글로 대신하고자 한다. 지금까지 1년 6개월 넘게 말해온 영성적 삶의 궁극적 도달점이 ‘기쁨’에 있기 때문이다. 기쁨은 관상의 열매이기도 하다.

기쁨은 내가 노력해서 쟁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동시에 기쁨은 받기 싫은데도 주어지는, 강요되는 선물도 아니다. 기쁨은 영원한 존재로부터 주어지는 순수한 선물이다.

역사적으로 걸출한 인물들의 삶에서 확인할 수 있지만, 진정한 기쁨을 창출해 내는 것은 고통이다. 우리는 하느님이 고통들을 거두어 가 주리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기쁨은 흔히 고통 한 가운데에서 우리에게 다가 온다. 고통스러워야지만 기쁠 수 있다는 것이 아니고, 그 고통 한가운데에서도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기쁨은 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반적인 사람들은 이러한 고통에서 찾아오는 기쁨을 깨닫기 힘들다. 그래서 고통을 피하려 한다. 많은 사람들이 영원으로부터 계신 하느님 존재를 모르기 때문에 고통의 의미를 해석할 줄을 모른다. 그래서 깨달은 사람은 고통받는 사람의 한 가운데로 간다. 그래서 하느님을 깨닫게 하고 지금 겪고 있는 고통에는 다른 의미가 있다고 가르쳐 준다. 기쁨은 하느님과 조화로운 삶을 살아가는지, 아닌지를 드러내는 표지다.

그래서 영성은 부드러운 유머감각을 수반한다. 늘 기쁘게 살기에 유머로 넘치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유머는 농담이 아니다. 억지웃음을 자아내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유머스럽게 된다. 바로 초월적 유머다. 어떻게 한없는 평화스러움 속에서 웃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게 될 때에 우리는 이 세계의 사물들에 집착하지 않게 된다.

하느님은 무한대의 하느님이다. 어디든 계시고, 어디에서든 열려 계신다. 개방되어 있다. 문을 활짝 열고 손님을 기다리는 궁궐과 같다. 그 집에 초대된 이가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기쁨의 성향 없이는 인정하는 기투는 결코 우리의 삶 속에서 실현될 수 없다. 기쁘면 모든 것을 줄 수 있다. 사랑하는 연인들은 모든 것을 내어 준다. 기쁘기에 하느님께 전적으로 투신할 수 있게 된다. 지난 나의 삶에 모든 위기들은 하느님께 대한 인정하는 기투의 길로, 나를 점진적으로 이끌었다. 고통조차도 하느님의 섭리였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아무리 좋은 일은 한다 하더라도 하느님이 보시기에는 잘못된 일일 수 있다.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우리는 너무나 자주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매일의 삶 안에서 우리는 이런 원리들을 얼마든지 터득할 수 있고, 정리할 수 있었던 것인데, 큰 것에만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계속해서 우리에게 호소하시는 작은 진리들을 놓쳐버린다.

하느님께서 처음 세상을 만들었을 때는 모든 형태가 좋았다. 스스로에게도 좋고 서로 함께 살아가는 모습도 모두에게 다 좋았다. 인간의 형태도 아름답고 거룩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원래의 형태가 파괴되기 시작했다. 사람도 바뀌고 그로인해 자연도 바뀌었다.

원래의 형태를 초월적으로 잘 유지하는 것이 바로 형성(formation)이다. 형태를 잘 못 이끌 경우 반형성(deforemation, 형편없는 꼴)이 된다. 형태를 파괴하여 반형성의 꼴을 이루게 되는 가장 무섭고 위험한 무기는 바로 나의 손짓, 나의 입에서 나가는 말 한마디, 나의 눈빛 등이다. 원자폭탄보다 더 무섭고 무자비하게 상대방을 죽일 수 있다. 하느님께서 미리 만들어 놓으신 형태를 모두 파괴시킬 수 있다. 이웃과 자연의 원래 형태를 깨뜨리고, 나 자 신의 원래 형태를 깨 버리는 것이다.

하느님께선 나를 형성되도록 미리 섭리해 놓으셨다. 이를 깨닫고 나를 더욱 성숙하고 깊이 가다듬어야 한다. 내가 누구인지, 인간이 누구인지, 그리고 형성하는 신적 신비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 묵상해야 한다. 이를 위해선 먼저 나의 오만함을 벗어던져야 한다. 그리고 겸손하게 머리 숙이고 형성에로의 초대에 기꺼이 응해야 한다. 그 초대에 응하면 엄청난 행복을 느낄 수 있다. 내가 원래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동안 고향을 잊고 살았다. 이제 돌아가자. 고향의 푸근함에 푹 빠져보자.

정영식 신부·수원교구 영통성령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