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정영식 신부의 영성적 삶으로의 초대] (70) 은총과 더불어 나아가기 ⑤

정영식 신부·수원교구 영통성령본당 주임
입력일 2009-07-14 수정일 2009-07-14 발행일 2009-07-19 제 2657호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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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라
내적 침묵 경험 통해 하느님과 하나되고픈 갈망 생겨
성경·고전 천천히 ‘형성적 읽기’하면 영적 진보 이뤄
삶의 모든 사건에서 주님 뜻 읽는 ‘묵상적 성찰’ 필요
지난 주 내용을 복습해 보면서, 영적 수련들의 내용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지난주에 나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경외(awe) ▲머묾(abiding) ▲주의(attention)의 성향들은 여섯 가지 기본 수련 내용들에 의해 이행될 수 있다고 했다. 그 여섯 가지가 바로 ▲침묵(silence) ▲형성(지향)적인 읽기(formative reading) ▲묵상적인 성찰(meditative reflection) ▲기도(prayer) ▲관상(contemplation) ▲활동(action)이다.

우선 침묵(silence)은 신적인 신비 앞에서 경외에 찬 놀라움 중에 멈추어 설 수 있도록, 생각들과 표상 및 관념들, 기억들을 가라앉힌 깊은 내적 고요상태를 말한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침묵을 말을 하지 않는 것이라고 단편적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침묵은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정신과 마음을 다루는 것이다. 내적 침묵이 중요하다. 정신의 깊은 차원이나 마음의 차원에 들어가면 완전한 평화와 참 고요한 상태에 도달한다. 돌을 던지면 마치 죄를 짓는 것처럼 고요한 연못을 떠올리면 된다. 실제로 많은 신앙인들이 이러한 내적 고요함을 체험했으며, 또 지금도 체험하고 있다. 이러한 체험은 새로운 갈망으로 이어진다. 좋은 음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먹고 싶다는 욕망이 생기게 된다. 아름다운 세계를 체험하면 그 세계로 가고 싶어 한다. 내적 고요함을 체험하면 우리는 우리의 삶과 세계의 중심 안에 계신 하느님과 더불어 하나가 되고 싶은 갈망이 일어나게 된다. 갈망이라는 것은 영적인 에너지, 곧 영감이다.

여기서의 갈망은 무엇을 위한 갈망일까. 나의 생각이 침묵에로 이끌어질 수 있도록 해 달라고 하는 갈망이다. 침묵이 체험을 가져오고 그 체험은 갈망의 욕구를 일으키고, 그 갈망은 다시 침묵을 애타게 요청한다. 침묵을 통해 하느님의 뜻이 내 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뜻이 내 안에 들어와야 하느님께 청할 것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다. 결국 우리가 참으로 갈망해야 하는 것은 영적인 에너지를 통해서 내 입을 다물 수 있게, 내 정신을 다물 수 있게 청하는 것이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좀 더 깊은 차원, 초월적 차원으로 나아갈 수 있다.

두 번째, 형성적인 읽기는 성경과 고전 작품들에 나타나는 지시 내지는 지침들을 받을 태세를 갖춤을 의미한다. 여기서 ‘형성적’이라는 말을 ‘읽기’ 앞에 붙인 것은 이 읽기가 단순한 독서가 아닌, 형성적 차원의 읽기라는 의미다. 하느님(형성하는 신적 신비)께서 미리 나에게 형성되도록 해 주신 그것을 형성시켜 나가는 차원의 읽기다. 단순히 침묵만으로는 영적 진보를 이루기 힘들다. 마치 어린 아기가 어머니의 도움으로 일어서듯, 우리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 진정으로 우리는 마음을 움직이고 우리의 삶들을 변모시킬 수 있다.

하지만 이 형성적 읽기는 천천히 진행되어야 한다. 영적 진보는 몰아 붙이듯 하는 것이 아니다. 형성적 읽기는 천천히 읽는 것이다. 서서히 그리고 조금 읽다가도 뭔가 느끼면 그 자리에서 바로 멈춰야 한다. 성령께서 무엇인가를 주신다는 것을 느낄 때, 그 한없이 깊은 진리 안으로 침잠해 들어가야 한다. 그 가운데에서 우리는 우리의 인간적인 영을 길러주는, 어떤 의미를 드러내 주는 성령을 기꺼이 기다려야 한다.

세 번째, 묵상적인 성찰은 이 세계 내에서, 우리의 일상 생활을 이루는 현세의 사건들 가운데서 전달되는 하느님의 부름을 포착하는 수련이자 기법이다.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우리는 여러 가지 사건들을 만난다. 하루에도 수없이 우리 주변에서는 많은 사건들이 생겨난다.

그 모든 사건들 안에는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고, 하느님의 뜻이 있다. 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그 의미를 읽어내지 못한다. 그것이 무엇인가를 읽어내야 한다. 이 작업이 묵상적 성찰이다. 문제는 우리 대부분이 사건들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읽어 내려고 하기 보다는 자기 중심적으로 판단한다는 점이다. 예수님께서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라고 말씀하신 그 율리우스 카이사르(BC100 ~BC44)는 이런 말을 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자기가 믿고 싶어 하는 대로 판단한다.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본다.” 우리는 나의 눈이 아닌,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아야 한다.

묵상적 태도는 실재에 대해서 우리의 생각들을 강제로 주입하는 형태가 아니다. 고요하게 깨어있는 상태에서 온유하게 존중하는 가운데 현재 나타나고 있는 것을 가만히 응시하는 것이다.

정영식 신부·수원교구 영통성령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