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우리의 영원한 귀감, 영성의 대가들 (58) 마더 데레사 (1) 생애

박재만 신부(대전 대흥동본당 주임)
입력일 2001-04-22 수정일 2001-04-22 발행일 2001-04-22 제 2246호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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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이념·민족 초월, 모든 이의 존경 한몸에
1997년 9월 5일 마더 데레사의 타계 소식이 매스콤을 통해 전해지자 온 세계는 한결같이「인류의 참 어머니」를 잃게 되었음을 안타까워하면서 애도했다. 그녀가 평상시 종교, 이념, 민족, 피부색을 초월한 모든 이로부터 얼마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었는지 새삼 온 천하에 드러난 것이다.

무엇이 그토록 세상 사람들로부터 그녀가 존경과 사랑을 받도록 했을까? 그것은 사랑의 기적을 이룬 가난이었다. 마더 데레사는 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버렸던 가난한 이들 중 가난한 이였다. 그녀에게 가난은 참 기쁨이었고 자유였으며 사랑의 힘이었고 역설적이게도 풍요로움이었다. 그녀에게 가난은 막힐 곳 없이 어디든지 왕래하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던 방편이었으며 비결이었다. 그녀는 '가진 것이 많으면 주기 어렵고 가진 것이 없을수록 더 자유롭게 많이 나눌 수 있다는 역설을 실천하고 증거하면서 각박한 오늘의 세상에 놀라운 사랑의 기적이 일어나도록 한 주님의 일꾼이었다.

마더 데레사는 1910년 8월 26일 마케도니아의 알바니아 공화국의 수도 스코페에서 아버지 니콜라 보약스히야와 어머니 드라나 베르나이의 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녀는 태어난 다음날 아녜스 곤히아라는 이름으로 세례성사를 받았다. 부지런하고 신앙심 깊은 어머니 드라나는 매일 아침 자녀들을 데리고 미사에 참여하는 것을 하루의 첫 과제로 여길 만큼 자녀들의 신앙교육에 정성을 들였으며 가난하고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관대한 사랑을 실천하였다. 아녜스는 어려서부터 그러한 불쌍한 사람들에게 열려있는 복된 가정 환경 속에서 자라났던 것이다. 아녜스는 소녀시절부터 성인전과 선교사의 활동에 대한 이야기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며 본당의 여러 단체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8세되던 1928년 어느 날 그녀는 기도 중에 선교에 대한 그녀의 관심이 수도생활로 이끄는 소명임을 깨닫게 되며 부르심에 대해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예수회 사제인 본당 신부의 지도와 도움으로 그녀는 더블린에 있는 로레토 성모 수녀회에 입회했다. 그 회의 수녀들이 인도에서 봉사하고 있는 일에 큰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녀는 더블린에서 두 달간 집중적으로 영어를 공부한 후 인도로 가 다질링에서 수련기를 시작했다. 1931년 5월 24일 유기 서원을 하면서「데레사」라는 이름을 택했다. 그 후 7년간 데레사는 로레토 성모회가 운영하는 캘커타의 성 마리아 고등학교에서 지리와 역사를 가르쳤다. 1937년 5월 24일 그녀는 종신 서원을 했고 그 학교의 교장직을 맡게 되었다.

1946년 9월 10일 대피정을 참석하러 다질링으로 가는 기차 속에서 데레사는 획기적인 소명을 느끼게 된다. 그 수도회를 떠나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살면서 그들을 도우며 봉사해야

한다는 소명을 선명하게 마음의 귀로 듣게 된 것이다. 데레사는 그 날을 「영감의 날」이라 불렀다. 그녀에게 그 수도원을 떠난다는 것은 고통스런 일이었으며 또 로마에서 특별한 허락을 받는 복잡한 절차가 필요했다. 결국 1948년 로마에서 그녀가 수도회 밖에서 수도자로 살 수 있도록 허락했다. 그 해 8월 16일 그녀는 로레토 성모회를 떠나 기초 간호학 3개월 속성 과정을 이수한 후 캘커타의 빈민가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1949년 3월 19일 제자인 슈바시니 다스가 아직 형성되지 않은 수도회의 첫 지원자로 마더 데레사와 합류했다. 다음 해 10월 7일 「사랑의 선교회」가 로마로부터 승인 받으며 10명의 회원이 수련기를 시작했다. 1952년 8월 22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임종자의 집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정원까지 아픈 이들로 꽉 들어차게 되었다. 1953년에 「사랑의 선교회」본원이 설립되었다. 그리고 빈민굴의 고아들을 위한 집을 운영했고 캘커타 외곽에 나환자들의 자립 센터를 열었다. 1962년 마더 데레사는 인도 정부가 수여하는 파드나 스리 상을 받았고 시토(SEATO) 국가들이 수여하는 막사이사이 상을 받았다.

1965년 2월 1일 바오로 6세 교황은 「사랑의 선교회」가 세계 가톨릭 교회 안에서 일할 수 있도록 인가해 주었다. 그 동안 인도의 지역 주교의 관할 안에서 만 활동하도록 제한 받던 그들이 세계 어디에서든지 선교 활동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때 이미 3백 여명의 수녀들이 여러 개의 시설에서 봉사하고 있었다. 베네주엘라에 해외 첫 분원이 시작되면서 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 유럽 등 여러 대륙에 분원들이 진출했다. 바오로 6세는 마더 데레사의 적극적 후원자가 되어 선교 활동을 원활하게 하도록 그녀에게 바티칸 시민권을 수여했다.

1971년엔 세계 여러 나라에 50 여 개의 분원을 갖게 되었다. 1969년 3월 26일 「사랑의 선교회 협조자회」가 교황청으로부터 회칙을 인가 받아 공식적으로 설립되었다. 끊임없이 늘어나는 이 협조자들은 세계 도처에서 사랑의 선교회의 일을 넓혀 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되었다.

영국의 저널리스트인 맬컴 머거리지가 글과 전파를 통해 마더 데레사를 서방 세계에 소개함으로써 그녀는 가톨릭 신자들 뿐 아니라 세계의 각 층의 사람들에게 알려졌고 1970년대에 국제적으로 유명한 상들을 받으면서 더욱 널리 알려졌다. 미국에서 「착한 사마리아인상」을 받았고 영국에서 「템플턴상」을 그리고 바티칸에서 「요한 23세 평화상」을 받았다. 1979년 12월 10일 그녀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노벨 평화상을 그녀가 온 삶을 바친 가난한 사람들의 이름으로 받게 되었다.

노벨 평화상을 받은 이 후 사랑의 선교회는 놀라운 속도로 세계 여러 나라로 뻗어 나갔다.

수많은 새로운 분원들이 열리고 놀라울 만큼 많은 새로운 성소자들이 몰려 왔다. 한국에도 사랑의 선교 수사회가 1977년에 진출했고 마더 데레사는 1981년 5월에 한국을 방문 한 후 두 차례(1982. 4, 1985. 1) 더 방문했으며 1981년부터 사랑의 선교 수녀회 분원이 설치되어 활동해 오고 있다.

1980년엔 14개 나라에, 1981년엔 한국을 포함하여 8개 나라에, 1982년에 12 곳, 1983년에 14곳에 분원을 열었다. 1986년부터 사랑의 선교회는 다른 선교사들에게는 닫혀있던 나라들에 들어가게 되었다. 에디오피아, 남 예멘, 니카라과, 쿠바 그리고 심지어 러시아의 모스크바에도 분원 설립 허가를 받았다.

1970년 이후부터 알코홀 중독자와 마약 중독자들을 치료하고 사회에 복귀시키는 치료 센터를 여러 곳에 열었다. 또한 나환자 병원과 나환자들을 위한 재활 및 사회 복귀 센터의 운영, 버려진 아이들을 위한 보호 시설, 죽어가는 사람들의 집, 결핵 환자들과 영양실조 걸린 이들을 위한 치료소 및 요양소들을 설치했다. 그리고 1980년대에 들어서서는 에이즈 환자들을 위해 활동하기 시작했다.

1990년 4월 16일 마더 데레사는 건강을 이유로 총장직을 물러났으나 같은 해 9월 총장직에 재선출되었다.

1991년 그녀는 걸프전을 중지시키기 위해서 두 나라 정상에게 호소했다.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조지 부시 대통령과 사담 후세인 대통령이 죄 없는 이들의 이름으로 열정적으로 호소하는 마더 데레사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1994년 2월 3일 미국 워싱턴의 조찬 기도회에서 초청 받은 마더 데레사는 클린턴 대통령 부처와 고어 부통령 부처 그리고 수천 명의 관중들에게 생명을 중시하고 평화를 위해 노력해 주기를 촉구하는 메시지를 선언했다. 1996년 빌 클린턴 대통령이 마더 데레사를 미국 시민으로 추대하는 헌장에 서명했다.

1997년 9월 5일 가난한 이들의 어머니이며 세계 모든 이의 영적 어머니인 마더 데레사는 87세로 이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이 때에 이미 그의 영성을 지속적으로 실현하는 분신들, 4000 여명의 사랑의 선교사들이 전 세계에서 운영하는 구호시설, 사랑의 집은 무려 566개나 되었다.

박재만 신부(대전 대흥동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