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정영식 신부의 신약 성경 읽기] 49.요한 묵시록(5)

정영식 신부
입력일 2008-01-01 수정일 2008-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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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는 삶 안에서 주님 기억하는 것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 자신 씻어야

요한의 환시 속으로의 여행을 계속해 보자. 요한은 지금 선택된 수많은 이들이 하느님 앞에 모여 있는 모습을 보고 있다. 셀 수조차 없다. 이들은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권에서 왔다. 이들은 희고 긴 겉옷을 입고 손에는 야자나무 가지를 들고서 어좌 앞에 또 어린양 앞에 서 있다(묵시 7, 9 참조).

그런데 원로 한명이 다가와 요한에게 묻는다. “희고 긴 겉옷을 입은 저 사람들은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느냐?” 요한이 “원로께서 더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하자, 원로는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이다. 저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을 것이며 해도 그 어떠한 열기도 그들에게 내리쬐지 않을 것이다. 어좌 한가운데에 계신 어린양이 목자처럼 그들을 돌보시고 생명의 샘으로 그들을 이끌어 주실 것이다”라고 대답한다(묵시 7, 13~17 참조).

현재 전 세계 인구의 약 25%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자신들의 옷을 십자가상 예수님의 피로 빨고 있다. 우리들이 성당에 나와 미사를 봉헌하고, 기도생활을 하고, 봉사활동을 하는 것은 모두 우리 자신의 옷을 그리스도의 피로 씻기 위한 것이다.

순교자라고 하면 꼭 칼날이나 작두에 목이 잘린, 피를 흘린 이들로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다. 인생살이 자체가 순교다. 인생을 살면서 얼마나 많은 고통과 어려움을 겪는가. 이 어려움과 고통을 예수님을 생각하고 예수님의 뜻을 묵상하면서 헤쳐 나가야 한다. 그럴 때 순교자가 된다. 삶의 순교자들은 훗날 하느님 대전에 설 것이다. 하느님은 그런 우리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묵시 7, 17).

하느님 앞에 수많은 의인들이 서 있는 장엄한 환시 뒤에 곧이어 그리스도가 일곱 번째 봉인을 떼는 장면이 나온다. 두루마리의 마지막 봉인을 드디어 뗀 것이다.

그 때 하늘에는 30분 가량 침묵이 흐른다. 요한은 이때 하느님 앞에 일곱 천사가 서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들은 나팔을 하나씩 들고 있다. 나팔이 곧 불려질 것 같은 분위기다. 실제로 천사들은 나팔은 하나씩 불기 시작한다(묵시 8, 1~6 참조).

“첫째 천사가 나팔을 불자, 피가 섞인 우박과 불이 생겨나더니 땅에 떨어졌습니다. 그리하여 땅의 삼분의 일이 타고 나무의 삼분의 일이 타고 푸른 풀이 다 타 버렸습니다”(묵시 8, 7).

무시무시한 징벌이 내려지고 있다. 이어 둘째 천사가 나팔을 불자, 불타는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져졌고, 그리하여 바다의 삼분의 일이 피가 된다. 또한 셋째 천사가 나팔을 불자, 횃불처럼 타는 큰 별이 하늘에서 떨어져 강들의 삼분의 일과 샘들을 덮친다. 많은 사람이 그 물을 마시고 죽는다.

또 넷째 천사가 나팔을 불자, 해의 삼분의 일과 달의 삼분의 일과 별들의 삼분의 일이 타격을 받아 그것들의 삼분의 일이 어두워졌다(묵시 8, 8~12). 첫 번째 나팔부터 네 번째 나팔까지는 자연적인 재해와 재앙이 일어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독수리 한 마리가 갑자기 나타나 하늘을 날며 이렇게 외친다. “불행하여라, 불행하여라, 불행하여라, 땅의 주민들! 아직도 세 천사가 불려고 하는 나팔 소리가 남아 있다”(묵시 8, 13).

아뿔사. 아직도 불려질 나팔이 세 개나 남았다. 지금까지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다. 지금까지가 자연 재앙이었다면 이젠 인간에게 직접 재앙이 나타난다.

메뚜기들이 나와 땅에 퍼진다. 그 메뚜기들에게 권한이 주어졌는데, 땅의 전갈들이 가진 권한과 같았다. 그것들은 땅의 풀과 푸성귀나 나무는 하나도 해치지 말고, 이마에 하느님의 인장이 찍히지 않은 사람들만 해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그 사람들을 죽이지는 말고 다섯 달 동안 괴롭히기만 하도록 허락되었다. 그 기간에 사람들은 죽음을 찾지만 찾아내지 못하고, 죽기를 바라지만 죽음이 그들을 피해 달아날 것이다(묵시 9, 1~12 참조).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고통. 묵시록은 여기에서 가장 극심한 고통을 묘사하고 있다. 고통의 극한은 어디일까. 어쩌면 하느님을 직접 대면하면서도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는 고통이 바로 그렇지 않을까.

고통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아직도 두 가지 불행이 더 남았다.

〈수원교구 영통성령본당 주임〉

정영식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