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교부들의 가르침 (50) 대(大) 레오 / 하성수 박사

하성수 박사(한님성서연구소)
입력일 2003-11-16 수정일 2003-11-16 발행일 2003-11-16 제 2373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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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과 타협으로 문제 해
생애

대 레오.
교회사에서 그레고리우스 교황(590~604)과 더불어 레오 교황(440~461)만이 후세에 「大」라는 경칭을 얻었다. 레오의 전기에 관해서는 많은 사실이 전해지지만 그가 태어난 곳과 시기는 정확하게 알려진 것이 없다. 그가 로마에서 태어났다는 사실도 불확실하다. 430년 네스토리우스 논쟁 당시 네스토리우스와 치릴루스가 로마의 주교 첼레스티누스에게 지지를 요청하였을 그 즈음에 레오는 로마 공동체의 봉사자(아마도 수석 부제)였다. 이 시기에 그는 로마의 마니교도, 펠라기우스파, 아리우스파에 맞서 활발하게 투쟁하였다. 그의 선임자 식스투스 3세가 440년 사망하였을 때 레오는 화해사절로 남부 갈리아에 있었다. 로마 공동체에서 그의 명성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그가 이 임무를 맡고 있던 중에 주교로 임명되었다는 사실에서 엿볼 수 있다. 레오가 로마의 주교직을 맡을 당시 서로마제국은 정치?사회적 질서가 와해되고 있었으며, 교회는 그리스도론 논쟁에 휘말려 어려움을 겪고 있던 상태였다. 레오는 21년 동안 로마의 주교로 활동하다가 461년 11월 10일에 사망하였으며, 베네딕도 15세는 1754년 10월 15일 그를 교회학자로 선포하였다.

수위권

레오는 자신이 모든 교회를 책임지고 있으며 모든 주교의 지도자라는 자의식이 강하였다. 그의 본보기는 베드로였다. 그가 자신의 축성일에 행한 모든 설교는 베드로에 관한 것이었으며, 자신을 베드로의 대리인이라고 여겼다. 그의 베드로론은 그리스도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은 사도들 가운데 첫째인 베드로의 탁월한 위치를 강조한다. 그리스도는 모든 전권을 베드로에게만 넘겨주었으며, 그 전권은 베드로를 통해서만 다른 사도들에게 분배된다는 것이다. 사도들은 「사도들의 수장」과 그 영예에서는 같지만 합법적인 지위에서는 같지 않다. 레오는 로마 상속법에 근거하여 「상속인」에 관한 이론을 줄곧 일관되게 전개하면서 베드로의 후계자로서의 탁월한 위치를 설명한다. 마태오 16, 18 이하에 따라 베드로에게 넘어간 전권은 유언자에게서 상속인에게 직접 그리고 전적으로 넘겨진다. 모든 주교들이 로마 주교의 중재를 통해서 자기들 교회에서 전권을 행사하고 지도적 임무를 수행한다면 로마의 주교는 모든 주교들보다 우월하다.

레오는 이러한 사상을 그의 설교들과 서간들에서 전개하였다. 그의 이러한 사상에 대해 서방에서 부분적인 반대 의견이 나타났다. 이에 대해 레오는 갈리아 지방의 전 교회에 우월적 지위를 요구한 아를의 힐라리우스를 단호하게 논박하였다. 한편 동방은 레오의 보편 교회적 지도권에 익숙해 있지 않았다. 교의적 분규에 그의 관여는 부분적으로만 뜻을 이룰 수 있었다. 수위권을 두고 콘스탄티노플이 로마와 같은 권리를 요구하여 칼케돈 공의회가 이를 부여하는데, 레오는 칼케돈 공의회의 규범규정 28조에 대해 이의를 제시하나 그것도 그 이상의 효과를 거둘 수 없었다. 1054년 동방 정교회와 가톨릭의 분열은 이전에 오랫동안 곪아온 여러 증상이 마침내 터진 것이었다. 그 증상 가운데 하나가 수위권이다.

신학적·교회정치적 역할

448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열린 교회회의는 극단적인 단성론을 주장한 콘스탄티노플 욥 수도원의 원장 에우티케스를 단죄하였다. 이 때문에 에우티케스는 몇몇 주교에게 항의서한을 보내는데,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플라비아누스 역시 로마의 레오에게 편지로 이 문제를 문의하였다. 레오는 449년 6월 13일 장래의 방향을 제시하는 유명한 「플라비아누스에게 보낸 교의서간」을 보냈다.

황제는 이 문제를 해명하기 위해 8월 1일 에페소에 교회회의를 소집하였으며, 레오도 교회회의에 사절들을 파견하였다. 8월 8일에 디오스쿠루스 사회로 열린 교회회의는 레오의 교의서간은 낭독하지 않은 채 로마 사절들의 반대에도 아랑곳없이 에우티케스를 복권하고 플라비아누스를 면직하였다. 플라비아누스는 유형지로 가는 도중에 사망하였다. 이런 까닭에 레오는 이 교회회의를 「도둑 교회회의」라 부르며 그 결정들을 승인하지 않았다.

이에 레오는 황실에 또다시 공의회 소집을 요청하나 뜻을 이루지 못한다. 그러나 450년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낙마하여 갑작스레 죽자 상황이 완전히 뒤바뀐다. 그의 누이 플케리아가 원로원 의원인 마르키아누스와 결혼하여 그를 황제로 공포하였다. 바뀐 황제가 레오의 「플라비아누스에게 보낸 교의서간」을 인정하고 수위권 문제가 해결되면서, 레오는 더 이상 공의회 개최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새 황제 부부가, 레오가 그렇게 소집하려고 애썼던 공의회를 개최하고자 하였다. 레오는 이에 반대하지 않았지만 그의 사절을 의장으로 임명하여 자신이 공의회를 주재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로써 칼케돈 공의회는 교회사에서 로마 주교의 수위권을 인정하여 그의 사절이 의장으로 임명된 첫 번째 전 세계 공의회가 되었던 것이다. 공의회는 레오의 「교의서간」을 추인하고 이를 바탕으로 신경을 정식화하였다. 그러나 공의회가 끝나자마자 신경의 수용을 둘러싼 논쟁이 시작되어 레오는 죽을 때까지 이 논쟁에 관여했다.

정치적 역할

레오는 452년 훈족의 왕 아틸라가 이탈리아를 침공해 왔을 때, 그는 황제의 특사와 함께 만투아까지 아틸라를 마중나가 그를 감동시키고 훈족의 침입을 저지하여 로마시를 보호하였다. 455년 반달족의 왕 게이세리쿠스가 로마 앞에 포진하였을 때, 레오는 그들이 로마를 약탈하는 것은 못 막았지만 그래도 두 번째로 로마시를 보호하는 데 성공하여 로마의 위대한 문화유산을 보존하였다. 이 일로 그는 로마와 이탈리아에서 국민의 수호자로 존경받았다.

레오의 활동 가운데 이 세 가지 두드러진 업적은 교회 영역에만 한정되지 않고, 몰락해가는 서로마제국에서 정치적.사회적.문화적 빈 공간을 채운 그의 폭넓은 사목활동 가운데 정점일 뿐이다.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주인이며 자신은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자의식에 바탕을 두고, 레오는 신학적.규율적.정치적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중용과 타협이라는 방법을 추구하였다.

하성수 박사(한님성서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