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교부들의 가르침 (49) 치루스의 테오도레투스 / 하성수 박사

하성수 박사(광주가톨릭대 교수)
입력일 2003-11-09 수정일 2003-11-09 발행일 2003-11-09 제 2372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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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론 발전 과정 체험한 신학자
생애

테오도레투스는 393년 안티오키아에서 부유한 그리스도교 집안의 독자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결혼 후 16년간 아이가 없었지만 은수자 마케도니우스의 기도 덕분에 아이를 갖게 되었다. 그래서 테오도레투스는 부모에게 그 이름의 그대로 「하느님의 선물」이었다. 그의 부모는 안티오키아 근방에 사는 은수자들을 자주 방문하였다. 이러한 가정의 영적 분위기는 그의 종교적 자의식을 일찍 일깨웠다. 그는 16세에 독서자가 될 정도로 어린 시절부터 성서에 통달하였다. 그는 자신의 교육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는 거의 말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을 통해서나, 토착 시리아인에게 문화어요 교양어인 그리스어에 정통한 사실을 보면 그가 제반 교육을 철저히 받았음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부모가 죽은 뒤 테오도레투스는 수도제도에 관심을 기울여,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시리아의 아파메아 근방에 있는 니케르타이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6년간을 지내다가 423년에 에우프라텐시스 지방에 있는 치루스의 주교로 임명된다. 이 직무를 맡은 초기에 그는 자신의 교구 내의 수많은 이단자들을 정통신앙으로 다시 이끌기 위해 끊임없는 논쟁에 온 힘을 기울였다. 네스토리우스 논쟁이 한창일 때 그는 이미 신학자요 성서에 정통한 학자로 명성이 드높아, 안티오키아의 주교 요한(441년 사망)은 그에게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치릴루스가 네스토리우스에게 보낸 파문문을 반론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는 431년 에페소 공의회에서 안티오키아 측의 대변인 역할을 하다 안티오키아인들과 함께 파문당하였다. 그는 433년 안티오키아 일치정식의 초안을 작성하였지만, 네스토리우스와의 우정 때문에 이 정식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였다. 438년 치릴루스가 이미 죽은 안티오키아 학파의 거장 타르수스의 디오도루스와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루스를 네스토리우스주의의 선구자라고 비난하자, 테오도레투스는 그들을 변론하는 작품을 저술하였다. 이후 몇 년간 평화는 유지되었지만 긴장감은 여전히 감돌았다.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티오키아 학파의 그리스도론 논쟁은 콘스탄티노플의 장로이자 수도원장인 에우티케스가 극단적인 단성론을 주장하면서 다시 불붙었다. 이 논쟁에서 테오도레투스는 에우티케스와 그의 추종자들, 그리고 치릴로의 후임으로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가 된 디오스쿠루스(454년 사망)에게서 악의에 찬 집중공략을 받았으며, 황제의 처분에 따라 그의 교구에서 추방되고 마침내 449년 군도 교회회의에서 단죄되었다. 이 때문에 그는 니케르타이의 수도원으로 물러났다.

물론 그는 이러한 조처에 대해 자신의 정통신앙을 교황 레오 1세에게 호소하였다. 451년 그는 칼케돈 공의회에서 복권될 때 자신의 전통신앙을 입증하기 위해 네스토리우스를 단죄해야 했다. 칼케돈 공의회가 끝난 뒤 그는 자신의 교구로 돌아가 사목활동과 저술활동에 전념하였다. 아마도 그는 460년 경쯤에 죽은 것 같다.

작품

테오도레투스는 알렉산드리아의 치릴루스를 제외하고 5세기 동방교회 역사에서 가장 많은 작품을 쓴 저술가이자 지도적인 신학자였다. 또한 그는 관상을 추구하는 수도자, 사목적 관점에서는 활동적인 주교, 박학한 호교가, 능변의 설교가, 전통을 중시하는 예리한 논쟁가, 경건한 성인전작가, 지적인 역사가였다. 그는 주교직을 맡기 이전에 시작한 저술활동을 죽을 때까지 지속하였다. 그의 저술활동은 유형의 다양함과 범위 때문에 매우 이례적이다. 테오도레투스는 작품을 쓸 때 당시의 관습과는 다르게, 다른 이들의 작품을 이용할 때 적지 않게 그들의 이름을 밝히거나 암시하였다.

그가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사용한 문헌의 연구는 그가 얼마나 폭넓은 교육을 받았으며, 박학하였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그는 성서를 해석할 때 성서 본문을 늘 정확하게 인용하여 그의 성서주석서는 지금도 70인역 성서본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그의 작품들은 안티오키아 학파의 스승인 타르수스의 디오도루스, 특히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루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영향

에페소 공의회 이후 테오도레투스가 레오1세 교황에게 보낸 호소 편지.
테오도레투스는 네스토리우스 논쟁부터 에페소 공의회, 에우티케스 논쟁과 칼케돈 공의회까지의 전반적인 그리스도론 발전 과정을 체험한 유일하고 중요한 신학자로서 그리스도론 발전에 산증인이다. 편지 119를 보면 그는 중용적 입장에서 네스토리우스파와 단성론파를 반박하였으며, 하느님의 말씀이 인간의 완전한 본성을 취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가 죽은 지 약 100년 뒤에, 삼장논쟁과 관련하여 일련의 교의서가 553년 제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단죄를 받아, 그의 작품 가운데 많은 부분이 소실되었다. 698년 롬바르드족 왕 쿠니베르투스가 이퀼레이아 주교좌 분열을 해결하였을 때, 작가가 알려지지 않은 어떤 시는 세르기우스 교황이 테오도레투스의 작품을 소각하는 것을 찬양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교회와 화해한 채 죽은 이 이단자의 성서주석 작품들을 열심히 읽었다. 얼마 뒤 그의 작품들은 아라비아어와 게오르기아어로 번역되었다. 그의 교회사는 라틴어로 번역되었으며, 최근까지 서유럽에서 역사 개론서 가운데 하나였다.

테오도레투스는 553년의 단죄로 많은 작품이 소실되었지만 성서주석가로는 꾸준히 명성을 얻었다.

이는 그의 주석서를 수많은 성서주석서 선집에서 발췌하여 인용한 사실에서 엿볼 수 있다. 대부분의 경우에 그의 성서주석 인용들은 선집의 본질적인 핵심을 이룬다. 또한 그는 당시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티오키아 학파의 성서주석 방법 사이에서 중도를 추구한 중용적인 성서주석가였다. 테오도레투스를 매우 높이 평가한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포티우스(9세기)는, 테오도레투스의 문체와 해석 내용이 이해하기 쉽다 하여, 그를 고대에 가장 훌륭한 성서주석가의 한 명으로 여겼다.

여하튼 히폴리투스와 오리게네스가 이끈 위대한 성서주석가 시대는 그와 함께 종말을 고하고, 성서주석서 선집과 편집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테오도레투스는 두 시대의 선회점에 살다간 인물이었다.

하성수 박사(광주가톨릭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