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그리스도교 영성사 (99)

전달수 신부(교황청립 로마 한인신학원장)
입력일 2002-10-27 수정일 2002-10-27 발행일 2002-10-27 제 2320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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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페브르.토마스 모어.에라스무스 등
열심한 인문주의자는 기도.성서 권장
24. 가톨릭 쇄신의 영성 (2)<.strong>

영성 훈련은 르네상스 당시 이교적 인문주의에 대항한 유일한 무기는 아니었다. 보다 직접적인 공격은 「그리스도인 인문주의자들」에 의해 행해졌다. 이들은 가끔 역사학자들에 의해 말하는 루터의 선구자들이라는 평을 받는다. 사실 이들이 사용한 여러 가지 비판들과 의견들은 개신교도들의 공격을 위한 탄약처럼 이용되기도 하였다.

열심한 인문주의자들은 사실 진지하였다. 그들의 주요 관심사는 교회를 이교적 인문주의로부터 보호하고 내적 생활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는 기도생활을 부흥시키고 성경 읽기를 권장하는 것 등이었다. 이들 중에는 니콜라스 쿠사, 비오 델라 미란돌라, 러페브르, 성 토마스 모어, 에라스무스 등이다. 에라스무스는 특이하게 영성의 역사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로테르담에서 1464년에서 1466년 사이에 태어난 에라스무는 「공동생활의 형제들」이 운영하던 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에 들어가 생활하다가 수도회를 그만두고 캄브라이(Cambrai) 주교로부터 1492년 성품을 받았다. 그는 해박한 지식으로 인해 전 유럽에 명성을 떨쳤다. 그리하여 교황 율리오 2세와 레오 10세, 까롤로 5세, 프란치스 1세, 헨리 8세 왕들로부터 높게 인정을 받았다. 그는 수도생활과 스콜라 신학을 반대한 대신 성경과 교부들에 기초를 둔 새로운 신학의 형성에 전적으로 헌신하였다.

에라스무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의 악령과 각자의 욕정에 대항하여 끊임없이 싸우는 전쟁이다. 그리스도인이 사용해야 할 가장 중심적인 무기는 의지를 강하게 하는 기도와 지성을 기르는 지식이다. 그리스도인 삶의 목표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므로 기도생활은 그리스도인이 세상으로부터 떠나 그리스도에게 집중할 수 있게 한다. 외적 종교 행위들까지도 만일 잘못 사용되면 참 신앙에 장애물이 될 수 있고 바리사이적 실천으로 그칠 수 있다. 에라스무는 이를 두고 「보통 사람들의 신앙」이라고 하였다.

위에서 언급한 그의 작품 「그리스도교 군인의 안내서」에서 그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지시 사항 22개와 죄와 유혹을 이기는 방법들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만일 그리스도인이 세상으로부터 떠나는 것이 어렵게 느껴진다면 세상의 덧없음과 죽어야 하는 인간의 운명과 궁극적으로는 세상의 것들로부터 떠나야하는 인간의 한계성을 생각하도록 권고하였다. 인간의 죽음에 대한 강조는 몬떼느와 16세기 스페인의 많은 영성 작가들이 여러 번 언급한 주제들이다.

에라스무스는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의 전투에서 이길 수 있기 위해서는 지식을 갖추어야 한다는 주제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강조하였다. 지식 그 자체는 승리를 위한 일차적인 조건이다. 우선 성경을 통해 드러난 진리와 스콜라 학파의 추상적이며 토론적인 지식만이 아니라 거룩한 생활로 안내하는 실천적인 지식을 알아야 하는데 그 근원적인 것은 성경 안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모든 이가 성경을 읽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왜냐하면 성경은 모든 이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빗나가지 않기 위하여 누구든지 교회의 가르침을 받아들여야 하며 교부들과 주석가들의 가르침도 중시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교회가 정의를 내리지 않고 결정을 내리지 않은 주제들은 신앙과 신심을 가지고 성경을 읽으면 성령께서 인도하신다고 보았다.

러페브르는 성령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개인적인 영감을 중시한 듯한 인상을 풍긴다. 모든 인문주의자들은 일반적으로 성경의 자의적 해석보다는 영적이며 우의적인 주석을 선호한 듯하다. 에라스무스는 자의적 해석자체에 머문다면 성경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자의적 주석 이면에 숨겨져있는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성경 읽기는 많은 열매를 내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에라스무스와 러페브르 그리고 이들의 동료들이 편 인문주의는 많은 가톨릭 사학가들로부터 심하게 비판을 받아왔다. 비록 이들이 건전한 교육과 인도로 사람들을 올바른 신심에로 인도하고 루터와 그의 개혁가들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비판을 받았던 것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으나 다음의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겠다. 첫째는 오직 성경과 교부들의 가르침에만 기초를 둔 그들의 새로운 신학은 중세기에 형성된 모든 신학적 지혜를 배척하고 교회의 교도권을 약화시켰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이들이 그리스와 라틴어 고전을 지나치게 연구하여 인간의 선성과 원죄의 결과에 대한 이해와 극기와 포기에 대한 요구를 지나치게 과장하였기 때문이며, 세 번째는 마치 타울러와 제르송의 글들과 가톨릭 인문주의자들의 신학을 루터와 여러 반가톨릭 종교 운동가들이 선호하고 일부분 인용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의 의도는 좋았으나 시기상조였다고 볼 수 있다. 그 시대는 여러 측면에서 개혁을 요구하는 시대였던 것만은 확실하다. 진정한 그리스도교적 인문주의는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가 등장한 17세기까지에 일어났다고 볼 수 있다.

전달수 신부(교황청립 로마 한인신학원장)